회화상황의 정착과 발전에 기여하도록 했다. 초기(1392~1550)에는 이상경(理想景)을 소재로 하는 정형산수화가 유행했으며, 북송․남송․원의 양식에 토대를 두고 발전된 고려 말기의 화풍을 계승하여 새로운 안견파(安堅派) 화풍이 형성되었다. 넓은 공간개념, 삼단구도법, 농담의 대비가 심한 필
쇠퇴하였다. 둘째, 추사 김정희와 그를 추종하던 화가들에 의해 남종화가 화단을 지배적 경향으로 대두되었다. 셋째, 북산(北山) 김수철(金秀哲; 19세기) 등에 의해 개성이 강하고 이색적인 화풍이 형성되었다. 넷째, 장승업계(張承業係)와 허유계(許維係)의 계보가 형성되어 현대화단으로 이어졌다.
회화는 중국으로부터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토대로 항상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으며 또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. 문인화풍과 서양화법을 기초로 한 이색적인 화풍이 공존한 시기로, 이러한 양식은 장습업의 다양한 소재의 작품을 통해서 잘 나타나며, 때로는 일본회화의 발전에
장승업이 많이 그린 화조화, 동물화, 기명절지화는 형태상 병풍으로 그려진
경우가 많아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음.
▷ 장승업의 회화를 양식적으로 볼 때, 한마디로 전통화법과 외래화법을 종합․절하여 자신의 세계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음.
두명의 사람을 희화화하여 그린
장승업(張承業)이란 인물을 꼽는다고 한다. 안견은 조선 초 세종(世宗)·세조(世祖) 연간의 회화 예술을 대표한다고 알려져 있고 정선과 김홍도는 조선 후기 영조(英祖)·정조(正祖) 시기에 활동한 화가들이다. 그리고 장승업은 조선 말기에 활동한 화가로 우리 회화사에서 근대 미술을 이끌어 낸 사람이
회화의 영향을 받아 안견 일파를 중심으로 하여 웅장한 모습의 산수를 주로 묘사하고, 그와는 대조적으로 인물은 미세하게 상징적으로만 나타내는 것이 압도적인 추세였다. 따라서 고사관수도의 화풍은 그 당시로서는 최신의 화풍으로 전통주의적이었던 화원들에게는 생소한 느낌의 양식이었으리라
장승업의 생애는 술과 예술, 그리고 방랑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. 임금의 명을 받드는 궁중 화사로서의 명성도, 그림의 대가로 받은 금전도, 가정 생활도 모두 그에게는 구속일 뿐이었다. 그래서 그는 술집과 그림을 부탁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을 전전하며 생활하였다. 당시에 장승업의 그림을 구
장승업의 삶보다
최민식과 안성기라는 걸출한 배우가 더욱 보고 싶기에 발걸음을 극장으로 옮겼다. 물론 그들의 연기와 영화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. 그 치만 날 사로잡은 것은 장승업이라는 인물과 그의 그림들 나아가 한국화의 매력이었다. 그 영화를 본 뒤 도서관과 인터넷 등을 통해 장승업의